바다에서 살다 강으로 왔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보는 도서부와 대륙부, 비슷하면서 다른 것
안녕하세요. 캄보디아 바탐방에서 인사드립니다. 저는 KOICA "캄보디아 농촌종합개발을 통한 평화마을 조성사업"의 현장을 맡고 있는 필드매니저 오성근입니다.
캄보디아의 급진적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가장 늦게까지 버틴 곳이 이 북서부입니다. 그때 묻은 지뢰가 아직 땅에 남아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생활 기반은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래서 코이카와 월드비전이 협력하여 이 자리에 마을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탐방·파일린·반떼이민쩨이 3개 주에서 2022년부터 2027년까지, 생활 기반을 고치고 농사 소득이 늘도록 돕습니다. 무엇을 할지는 주민들이 직접 정해 신청합니다.
이곳, 바탐방에서 살다보면 하루에 한 번쯤은 예전에 거처왔던 나라들이 겹쳐 보입니다. 아침 좌판의 국수에서, 사원 계단을 지키는 뱀 조각에서, 4월이면 얼굴로 쏟아지는 물세례에서요.
대륙부와 도서부 지도
저는 스리랑카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 필리핀 마닐라와 비사야(사마르)를 거쳐 라오스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 그리고 지금의 캄보디아 바탐방까지 왔는데요.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동남아는 두 덩어리입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처럼 바다에 흩어진 도서부, 라오스와 캄보디아처럼 대륙에 붙어 있는 대륙부. 저는 섬에서 먼저 살았고, 지금은 강가에 있습니다.
먼 옛날 이 둘은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인도에서 온 글자와 신들이 바다와 강을 따라 함께 퍼졌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인도네시아 자바의 "보로부두르"는 사촌쯤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 살다 보면 "어, 이거 인도네시아에도 있었는데" 하는 순간이 자주 옵니다. 또 그만큼 "여긴 완전히 다르네" 하는 순간도 있지요. 캄보디아를 가운데 놓고 ‘같지만 다른 점’ 다섯 가지만 골라 봤습니다.
1. 바람을 피해 살다가, 이젠 물높이를 살피며 삽니다
바탐방에서 바다는 멀고, 대신 강과 호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서운 건 물살이 아니라 물의 높낮이입니다. 톤레삽 호수는 해마다 물길이 한 번 뒤집힙니다. 우기에는 메콩강 물이 거꾸로 밀려 들어와 호수가 몇 배로 불어나고, 건기에는 도로 빠져나갑니다. 사람들은 그 오르내림에 맞춰 집을 띄우고 논에 물을 댑니다.
반면 필리핀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람입니다. 태풍 소식이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짐을 싸서 동굴로 올라갔고, 저는 며칠씩 이어질 정전에 대비해 물을 받아 두고 손전등과 라면을 챙겼습니다. 섬에서는 '바람이 오면 어디로 피할까'를, 강에서는 '물이 어디까지 올라올까'를 먼저 묻습니다.
2. ‘1월 1일만 새해인 줄 알았는데’
캄보디아의 새해는 4월 중순, 일 년 중 가장 더울 때에 옵니다. 벼를 거두고 비를 기다리는 짬이지요. "쫄츠남"이라고 부르는 사흘 동안 온 나라가 고향으로 가고 사무실은 일주일쯤 텅비게 됩니다. 거리에서는 서로에게 물을 뿌리지요. 처음에는 "왜 하필 제일 더울 때?" 싶었는데, 한 번 맞아 보면 압니다. 제일 더울 때라서 뿌리는 겁니다. 라오스도 같은 주에 새해를 맞아 "삐마이라오"라 부르며, 똑같이 물을 뿌립니다.
캄보디아 ‘쫄츠남’에 마을을 도는 ‘뜨롯’ 춤 행렬
루앙프라방의 “삐마이라오”. 두 나라가 같은 주에 같은 방식으로 새해를 맞는 점이 재밌습니다.
섬의 한 해는 다르게 나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라마단"이 끝나고 "르바란"이 오면 온 나라가 고향으로 움직입니다. 필리핀에서는 9월이면 벌써 캐럴이 나옵니다. 달 이름 끝에 -ber가 붙는 넉 달 내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래서 그 넉 달을 "버 시즌"이라 부릅니다. 같은 동남아인데 새해가 서로 다른 계절에 옵니다.
3. 동남아에 남은 인도의 유산
왼쪽부터 인도네시아 국장의 "가루다", 태국의 "나가", 말레이시아의 "하누만", 캄보디아의 "가네샤". 넷 다 힌두교에서 온 신인데, 강에도 섬에도 똑같이 남아 있습니다.
국장: 인도네시아 국가 상징(퍼블릭 도메인) · 사진: Robersona (퍼블릭 도메인) · Shesmax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 가네샤: 필자 촬영
바탐방 사원 계단에는 일곱 머리 뱀 "나가"가 엎드려 있습니다. 절 입구를 지키는 이 뱀은 캄보디아의 국교인 불교가 아닌, 힌두교에서 왔습니다. 원숭이 장군 "하누만", 코끼리 머리의 "가네샤", 새의 신 "가루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넷은 발리의 사원 앞에도 서 있습니다.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의 국영 항공사 이름에도 "가루다"가 있습니다.
이야기도 같이 건너왔습니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는 캄보디아에서 "리엄케", 라오스에서 "프라락 프라람"이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림자극 "와양"의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줄거리는 같은데 주인공 이름이 다릅니다. 불교 나라로 넘어와서는 라마 왕자를 부처의 전생으로 보기도 합니다.
4. 간판은 못 읽지만, 바가지는 없습니다
물건을 살 때, 바탐방 시장에서 가격표를 읽으려면 아직 한참 걸립니다. 크메르 문자는 자음만 서른세 개인 데다, 모음이 글자의 위아래와 양옆에 달라붙습니다. 라오스에서도 그렇긴 했습니다. 라오 문자와 크메르 문자는 둥글둥글 닮았는데, 못 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자를 못 읽으면 시장에서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바가지를 씌우지도, 값을 깎아 주지도 않습니다. 부르는 값이 그냥 값입니다. 인도네시아 시장에서는 값을 깎는 일이 인사이자 대화였는데, 여기서는 깎아 달라고 하면 서로 조금 머쓱해집니다.
그래도 쓰는 글자는 다르지만 말은 이어져 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낱말을 동남아 나라들이 어떻게 쓰고 읽는지 늘어놓아 봤습니다.
산스크리트어 "구루"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낱말. 스리랑카에서 필리핀까지 이어집니다.
늘어놓고 보니 소리가 거의 같습니다. 뿌리가 산스크리트어 "구루"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낱말이 대륙을 지나 바다를 건너 필리핀까지 닿아 "구로"가 되었습니다. 옛날에 배가 오간 길이 낱말에 그대로 남은 셈이지요.
뿌리가 같다고 지금 모습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바탐방의 아침은 탁발로 시작합니다. 승려들이 맨발로 줄지어 걸어가면 주민들이 문 앞에 나와 밥을 덜어 드립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저를 깨우던 건 새벽 모스크의 아잔 소리였고, 필리핀에서는 회의든 점심이든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다 같이 "아멘" 하고 성호를 긋고 나서야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인도에서 온 바탕 위에 불교가 한 겹을 얹었고, 섬 쪽에는 이슬람과 가톨릭이 또 한 겹을 얹었습니다.
5. 국수 옆 바게트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놈반쪽’을 처음 먹은 건 현지 직원 집에 초대 받았을 때였습니다. 가는 쌀국수에 생선으로 끓인 노란 국물을 붓고, 국수보다 많은 채소를 얹어 먹습니다. 이 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국수라고 합니다.
아침 좌판에는 국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맑은 고기 국물의 "꾸이띠유", 중국계 "화인(華人)"이 가져온 국수입니다. 그 옆에는 바게트가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놈빵", 라오스에서는 "카오지", 베트남에서는 "반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남기고 간 빵입니다. 아침 한 끼에 세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크메르와 화인과 프랑스가요.
왼쪽부터 캄보디아 "꾸이띠유", 필리핀 "판싯", 인도네시아 "미고렝". 강의 국수는 말아 먹고, 섬의 국수는 볶습니다.
사진: yashima (CC BY-SA 2.0) · pulaw (CC BY 2.0) · Gunawan Kartapranata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섬에서는 국수의 역할이 다릅니다. 필리핀의 "판싯"과 인도네시아의 "미고렝"은 볶은 면인데, 잔치가 있으면 큰 접시에 볶아 내 여럿이 덜어 먹습니다.
강에서는 아침밥이고, 섬에서는 잔치 음식입니다. 그 접시에도 화인이 다녀갔고, 필리핀의 "아도보"는 이름부터 스페인어입니다. 강 쪽에 프랑스가 바게트를 두고 갔다면, 섬 쪽에는 스페인이 삼백 년 넘게 머물며 이름과 부활절을 두고 간셈입니다.
뿌리는 하나였습니다. 인도에서 온 신과 이야기와 말, 화인이 가져온 국수까지 바다에도 강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달라진 건 그 위에 무엇이 더 쌓였느냐입니다. 대륙부가 한 겹이라면, 도서부는 여러 겹입니다.
지도만 봐서는 몰랐습니다. 여기 와서 물을 맞아 보고 국수를 한 그릇씩 먹어 보고 나서야 알았네요.
다음 편에서 또 찾아올게요. 캄보디아에서, 성근 드림.









메인 다이어리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