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케냐에 파견 중인 김예은입니다.
오늘은 제가 이곳 케냐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마주한 작은 변화들에 대해 적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기후변화 대응 사업은, 기후변화로 인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케냐 주민들과 함께 복원 활동, 수자원 시설 설치, 정책 개선 등을 통해 보다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통합적’ 기후변화 대응 사업입니다. ‘통합적’이라는 말처럼, 제가 맡은 사업에는 산림, 물, 생계, 정책, 교육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얽히고 맞물려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오늘 '물'을 선택하여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물’은 이곳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물이 있어야 가축들에게 물을 줄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나무도 자라며, 아이들도 씻고 학교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상황은 점점 달라졌습니다. 비가 쏟아지다 뚝 멈춰버리고, 몇 달씩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우기와 건기의 경계마저 흐려졌습니다.
이곳에서 물 부족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삶 전체를 위협하는 문제라는 걸 현장에 있으면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부족해진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희 사업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요,
그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정하면서도 가장 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물과 관련된 존재, ‘워터팬(Water Pan)’ 에 대해 나눠보려 합니다.
‘워터팬’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사실 저도 이 사업을 하며 처음 접한 단어입니다.
Water(물) + Pan(그릇 혹은 얕은 웅덩이)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요, 쉽게 말해 비가 올 때 그 물을 담아둘 수 있는 ‘큰 빗물 웅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슷한 개념으로 ‘저수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요, 워터팬은 저수지보다 작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땅을 파고 다져 만든 자연형 빗물 저장소에 가깝습니다. ‘마을 맞춤형 소규모 물 저장 시설’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물은 기본적으로 가축에게 물을 주거나,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걸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실 수 있을 만큼의 정수는 되지 않기 때문에 식수로는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대형 저수지를 짓기엔 땅도, 예산도 부족한 이 지역에서, 워터팬은 마을에 꼭 필요한 물을 조금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024년 9월,
건기 한가운데의 케냐 나록주 나로수라 지역. 물이 자연스럽게 고일 수 있는 저지대를 골라, 드디어 첫 삽을 떴습니다. 공사에 앞서 주민들과 함께 모여 앞으로 어떤 작업들이 진행될지 설명하고, 걱정되는 점이나 우려되는 부분도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그날 주민들이 돌아가며 전해준 “고맙다”는 인사가 괜히 오래 마음에 남아, 건강한 부담감이 되어 이분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다짐을 다시 만들어냅니다.
3개월 뒤, 2024년 12월.
비를 뚫고 다시 찾은 현장엔 물은 조금씩 고이고 있었지만, 저 끝까지 물이 찰 수 있을까 반신반의의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3개월 후, 2025년 3월.
워터팬 가장자리 끝까지 물이 가득 찬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가축급수대와 생활용수 급수대도 함께 설치되었습니다. 지금 찬 이 물은 앞으로 몇 달간 이어질 건기를 마을이 버텨내는 데 분명한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제는, 매년 건기를 앞두고 느끼던 막막함과 불안이 조금은 덜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났다고, 물이 고였다고 해서 월드비전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워터팬을 운영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손에 넘겨드렸지만, 저희도 그 옆에서 여전히 함께하며, 주민분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의사결정에 도움을 드립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더 중요한 시작일 것입니다.
최근 있었던 한 가지 고민을 끝으로, 오늘 일기를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워터팬에 저장된 물은 가축용과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식수로 잘못 사용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시설 완공 전후로 지역 물 위원회를 대상으로 운영과 유지관리 교육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늘 새롭고 복잡한 상황이 생깁니다.
얼마 전엔 인근 학교에서 워터팬 물을 학교로 연결해 사용할 수 있도록 파이프를 설치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물 부족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되는 요청이었지만, 워터팬의 물은 현재로선 생활용수까지만 정수 가능한 수준입니다. 특히 해당 학교는 절대적인 물이 부족하여, 현실적으로 생활용수와 식수의 구분이 어려운 환경이기에 실제로 식수로 사용될 우려가 있어 이번엔 연결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만든 시설이 어디까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에 대해 단순한 기술적 기준을 넘어서 지역의 현실과 주민들의 삶, 그리고 안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걸 크게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더딜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고 있습니다.
워터팬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지만, 물이 없던 곳에 ‘쓸 수 있는 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마을의 일상은 분명히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그 변화가 더 안전하고, 더 오래 지속되도록 현장에서는 여전히 질문하고, 조율하고, 배우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완성된 해답은 아직 없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과정 속에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의 응원과 관심이 지구 반대편 케냐의 작은 마을들의 물길을 한 걸음 더 넓히고 있습니다.
새벽에 글을 쓰다 보니, 조금 감성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 다음엔 또 다른 생생한 현장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